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의 티베트 침공 (문단 편집) === 시작 === 중국 황제들은 13세기 이래 티베트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해 왔고[* 티베트를 굴복시킨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가 티베트에 대한 권리를 계승했다고 주장했으며 청나라는 티베트를 지배하기까지 했다.] 이는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중화인민공화국에 티베트를 침공할 명분이 되고도 남았다. 때마침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 정권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중국 대통일"을 완성함으로써 중국의 티베트 통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달라이 라마]]를 국가 지도자로 하는 신정 체제 하의 티베트는 독립국이기는 했지만 중국에 저항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20세기 초반에 티베트는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에 외교적 접근해서 중국을 견제하고자[* 우습지만 티베트가 중국 영토로 확정된 게 [[영국의 티베트 침공]]으로 인한 라싸 조약 때문이다.] 했지만[* 비슷하게 [[몽골]]도 [[외몽골 출병|중국의 무력침공 위협에 시달렸지만]] [[소련]]의 도움을 받아 비록 소련의 내정간섭을 당하긴 했지만 독립은 지킬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더 이상 영국이 인도 건너편에 있는 티베트에 신경쓸 이유가 없어져 버렸고 무엇보다 영국은 자국도 유지시키기 힘든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돈이 없어 유럽에서 가장 빨리 [[징병제]]를 폐지했으며 거의 대부분의 [[식민지]]를 독립시키며 영향력을 잃는 와중에 해외파병이나 군사지원은 너무 어려웠다. ] 또 주변 강국인 신생국가 인도 공화국은 아직 티베트를 도와줄 여력이 부족했다. [[파키스탄]]이 [[친미]] 국가로 나서던 때라 파키스탄과 적대관계인 인도는 [[소련]]에 접근했고 [[자와할랄 네루]] 역시 티베트 일대에서 양보한다면 중국과의 또 다른 분쟁지역인 카슈미르에서 양보를 얻을 수 있다고 오판하고 있었다. 1950년 1월 1일에 중국 국제방송(라디오 베이징)은 "판첸라마 10세의 요청으로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해방시킬 준비가 되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티베트, 인도, 영국, 중국의 대표단이 협상을 논의했으며 티베트 대표단은 최종적으로 1950년 9월 16일에 델리에서 중국측 대표단을 만났다. 중국측 대표인 위안중센(袁仲賢)은 [[한일병합조약|"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다, 중국이 티베트의 국방, 외교, 무역을 담당한다"]]고 하면서 이를 받아들이면 평화적인 해방이 될 것이며 거부하면 전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